본문 바로가기

수필

거꾸로 사는법

 겨울의 긴 잠을 깬 초목들은 서둘러 일 년 농사를 시작하는데 직장인들은 아직도 불황의 무게에 눌려 닥쳐올 불안감에 하루를 놓지 못한다.

 

토요일 오후, 시스템 오픈을 위해 야근하는 동료들이 있다. 30대 후반을 달려가는 젊은이들. 친구도 만나고 연인과 사귀고 싶다. 빌딩 앞 낯선 이들만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 뱉어나고 다시 사무실로 오른다. 변경되는 요구사항, 수정되는 프로그램 오류, 하루란 시간은 시멘트로 닫힌 공간 속에서 혼자만 너무 빨리 빠져나간다.

 

직장인이란, 사소한 희망에서 시작해 거대한 절망으로 끝나는 존재라는 마루야마겐지의 말처럼 직장에 길들여진 이삼십년 삶, 한 쪽만 바라보고 달려온 중년, 이제 멤버쉽 승차권을 반납하고 간이역에 내려야 한다. 종착역 까지는 아직도 반을 더 가야 하는데 무거워진 열차는 자꾸 짐을 내려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완행열차로 예전에 갈아탔다. 경험하지 않았던 두려움을 감내하면서 후반전을 준비한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전반전이 아닐까 생각을 바꿔본다.

 

늦었지만 협동조합을 준비한다. ‘빅트리협동조합이름을 짓고 뜻있는 지인들이 모였다. 아직은 아이템도 없지만 직장을 다니는 사람, 사업을 하는 사람, 또 다른 삶의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많이 아는 것 같지만 현실은 소통의 갈증을 겪고 있다. 한 두 명의 온라인상의 활동으로는 과반수 회원들을 끌어 모으기 역부족이다. 갈등의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화계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도전 해본다. 종교적 이념을 떠나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하고 싶고 서로간의 침묵의 속을 알고 싶다.

산행, 108, 발우공양(鉢盂供養), 참선의 시간들 그리고 마주한 찻상에 시간을 정지시킨 채 각자 일상 속에서 벗어나 하나의 공간속에 기다림을 만들어 본다. 어느덧 녹차 향기가 방안에 가득 채워진다.

12일의 여정, 참여한 사람들과 찻잔의 온기를 이야기하며 스님과 헤어지는 마지막 시간, 서정주 시인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의 한 구절이 기억난다고 하신다.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오늘도 함께 살기 위한 방법을 배운다. 왠지 혼자만 살아온 시간, 멈추면 큰일 나서 앞으로만 달려가기만 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자신이 만든 틀 속에서 길들여진 우리들. 조합원리더는 독서모임이란 새로운 시도를 한다. 선정된 주제의 서적을 공부하여 한사람씩 말하는 연습을 하고 어떻게 소통하는지 무슨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가슴속에 가두어 두었던 꿈들은 어떤 것인지.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란 말처럼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직도 너무 많은 것들 가지고 다닌다. 몸이 무거워진 열차는 달릴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진정 필요한 것은 창고에 쌓아둔 박스 속에서 잠자고 있는데.

빨리 출발해야하는 압박감에 서로들 하던 것을 버리지도 못하며 옮겨 타지도 못하고 플랫폼에 서성이며 눈만 깜박이는데 누군가는 더 멀어진 혼자만의 방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부질없이 만남의 시간들을 후회하면서.

또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한성대에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방향으로 숙정문을 지나 창의문으로 내려와 경복궁 서촌의 체부동잔치집에서 파전에 막걸리 한 병씩에 한마디씩 풀어본다. 우리 아지트를 만듭시다. 유행 떠나간 세운상가 뒷골목도 좋다. 다들 오기 쉬우며 최소한의 임대비를 낼 수 있는 사무실, 누군가 미리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타 놓고 만나기를 기다리는 바람 같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등산객, 연인들, 외국인들이 토요일 오후를 가득 채운다. 요즘 북촌, 서촌이 뜬다고 한다. 바쁜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나온 김에 둘만 북촌마을 사람구경을 갔다. 어릴 때 살아온 풍광들이 이제는 매스컴을 타고 관광지가 되어 찻집, 음식점들이 골목 속에서 화장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지트가 만들어 지기를 고대한다. 프리미엄 있고 폼 나는 공간이 아니어도 잠시 들러 술 한 잔하고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자리, 살아가면서 불편함을 풀어가는 자리 그것이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지금은 비록 느리지만 언젠가는 비즈니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공동의 공간으로.

 

완행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잠시 멈추어서도 된다.

오랜만에 구석에 처박힌 라디오를 켠다. 이삼십년 전 늦은 밤 홀로 고민했던 젊음의 시간들, 한 페이지를 펼쳐본다. 지금도 선율이 들려온다. 김광석 가수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노랫말이...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있건만...

 

천천히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무엇이 답인지도 아직도 모르지만 오늘도 반복되는 삶속에서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도전해 보고 싶다. 노랫소리가 작게 들린다. 오른쪽 무릎이 아파오고 오한이 살짝 가슴을 흔든다. 4시간의 오르고 내림의 무리한 산행의 후유증인가 보다. 옆으로 누워보고 잠을 청해본다. 충전의 시간 필요하다. 예전처럼 급속 충전은 안 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거꾸로 사는 법을 시작해본다. 응원해 주세요.


<출처: 한국수필 2015년 5월호>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뜻밖의 만남  (0) 2014.12.25
간병  (0) 2014.07.21
커피가루 날리며  (0) 2013.01.18